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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구의 아카이브

이상찬 양평군립미술관장 - 박정구의 기하학적 면들이 만들어낸 역동성

21세기 현대미술은 예술의 탈 장르를 넘어 그 한계를 가늠할 수 없는 예술의 혼돈 시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일상생활에 미술의 개념을 도입하거나, 작가는 아이디어만 제공하고 타인의 손을 빌리거나, 공장에서 제작되기도 하며, 무엇이든 작가의 선택만 받으면 예술이 된다.

마르셀 뒤샹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와 같은 개념 미술이나 테크놀로지 아트 등 모든 물질이 미술이 될 수 있고 조형 활동이 될 수 있으며 미술가들은 전통적인 의미의 미술 창조자의 범주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고 연출자나 기술자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예술과 비예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예술가와 감상자의 경계마저 모호해져 감상자가 작품의 제작에 참여해야 비로소 작품이 완성되기도 하는 참여 예술, 작가나 관람객이 연출가가 되기도 하고 미술과 기술의 경계마저 무너져 버린 시대의 중심에 우리는 서 있다.

박정구의 작품이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것도 아닌데 어찌하여 이러한 단상이 떠오를까? 이는 출발선에 서있는 그가 지향하고자 하는 의식체계를 들여다볼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의 작품을 보는 순간 대각 면 석고상을 연상시키는가 하면 종이접기를 연상하게 된다. 작가는 조소의 기본적인 수련이나 제작과정을 거쳐보지 않았지만 용감(?)하게도 3D modeling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대각 면의 입체 형상 샘플을 만들고 Formax라는 재료를 이용하여 자르고, 칼집을 내어 접고, 접합하는 과정을 통하여 종이접기를 연상시키는 조형물을 만들어 낸다.

첨단 테크놀로지가 미술의 장르 해체를 넘어 인간과 예술을 변화시키고 있는 시대에서 전통적인 조소의 개념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박정구의 작업 과정은 전통적인 조소의 개념으로 접근해 보면 소조도 아니요, 조각도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소조는 무른 재료를 안에서부터 붙여가며 만드는데 반해, 조각은 재료를 밖에서부터 깎아 가며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자르고, 접고, 접합해 나가는 작가의 작업 형태는 이러한 재료나 제작 과정과는 무관하다. 그는 3차원의 공간에 입체로 형태를 표현하는 조형 예술이라는 점만을 조소와의 공통분모로 인식하기에 이른다.

박정구의 기하학적인 대각 면이 만들어낸 동물이나 인체는 힘과 역동성을 느끼기에 부족하지 않으며 포효(咆哮)하는 그레이하운드의 속도감까지 제공해 주고 있다. 이 조형물들을 천장에 매달아 설치하고 영상을 만들어 투사하여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가 하면 조명에 의한 그림자 효과로 전시장을 더욱 깊이 있고 확장된 공간으로 연출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조각과 공예, 설치, 연출, 테크놀로지의 경계를 허물고 융합을 지향하는 그의 작품 뒤에는 작가의 끊임없는 조형 연구가 있었겠지만, 그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단번에 깨우쳐서 선의 경지에 이른다는 돈오돈수(頓悟頓修)의 경지가 7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박정구 작품의 특성이자 특징으로 자리 잡은 종이접기 같은 형태와 반복된 기하학적인 면 분할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율배반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Formax의 텍스처가 주는 가벼운 느낌, 즉 중량감에 대한 문제다. 가볍다는 것은 천장에 매달거나 해서 연출하는 경우에는 장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물리적으로는 가벼움을 유지하더라도 시각적으로는 무게감에 대한 배려가 요구된다.

반복의 형식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통일감과 안정감을 주는 반면 변화는 감소할 수밖에 없다. 이는 기법의 한계가 아닌가 한다. 변화와 통일, 단순과 절주(節奏)의 미학이 작품 속에서 조화롭게 승화되기를 기대해 본다.

작가가 살아온 궤적이나 열정, 그리고 창의적인 사고로 미루어 볼 때 돈오(頓悟)하였으니 점수(漸修)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작가의 성정이나 작품에 임하는 태도로 미루어 그가 가고자 하는 길에 가능성은 활짝 열려있다고 생각된다.

 

양평군립미술관장 이 상 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