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잔잔해지는 것을 느꼈을까?
소설 속 한 문장.
" 그 숱하고 징그러운 이야기들... "
살아가는 삶에 관한 애틋함이 느껴지는 소설이다.
72세의 이순일씨는 어렸을 때 순자로 불렸었다한다. 이 시기에 태어난 우리의 부모님 세대는 종종 이름과 생일이 엉뚱하게도 호적에 다르게 기록되어 있기도 하고, 생일은 고사하고 한자 이름이 다르게 적히거나 아예 이름이 다르게 기록된 경우가 흔했다. 작가의 말에 순자라는 이름이 왜 그렇게 많은지.. 이 질문이 소설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사실 내 주변에도 그 이름이 있으니 흔하긴 흔한가보다. 그 순자님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전화 한번 해봐야겠다.
책을 읽는 동안 옆집에서 들리는 이웃 가족들의 대화 소리를 엿듣는 것 같았다. 책에 한참 몰입해 있었던 그 날 나와 아내는 서울의 서촌 골목 구석구석을 쏘다녔다. 우리는 골목 곳곳을 탐험하듯 다닐 때 죽이 잘 맞는 것 같다. 통인시장에서 돼지국밥을 거하게 먹고 박서보생가와 옥인동 길, 윤동주시인의 하숙집 터, 수성동계곡, 윤동주기념관, 부암동거리, 입장은 못했지만 석파정까지. 그 동네의 특징은 유서깊은 건물들과 일제 강점기의 하꼬방, 간혹 한옥 기와집, 구식 저층빌라와 현대식 고급 빌라가 한데 섞여 있다. 이상하게도 그 동네를 지나갈 때 이 책에서 느껴지는 애정과 푸근함과 아련함이 가끔 삶에 대한 서글픔 비슷한 감정을 올라오게 했다. 그 집안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오는 듯하다. 그 서촌의 느낌과 오늘 읽은 황정은 작가의 연작소설 연년세세는 무슨 궁합이라도 있는 것처럼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순일씨의 파묘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내 마음을 축축한 상태로 만드는 것 같았다. 더이상 몸이 따르지 않아 해마다 찾아뵙던 할아버지의 산소 앞에서 나도 이제 늙었으니 이젠 못 올 것 같다고 작별인사를 드린다. 파묘하고 유골을 찾아 화장하고... 마지막으로 드리는 제사상 앞에서 큰절을 올리고, 돌아서는 그 발걸음에 인생의 무게가 느껴지는 듯했다. 아마도 이런 풍습은 우리시대로 끝일지도 몰라. 애들은 시간도 관심도, 여유도 없다. 세월과 세태의 변화와 함께 나의 심리적, 정서적 흔적까지도 끝이 오고 있다는 신호 같다. 애써 이런 생각은 굳이 밀어내고 살지만 누구에게나 그날은 곧 오고야마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묻어두고 해처럼 밝게 산다.
나의 아버지와 엄마가 갑자기 그리워지기도 했다. 부모님을 생각하면 언제나 눈물이 고인다.
명절 때가 되면 산소에 가서 벌초하고 성묘하고, 간혹 들렸던 산소 터이야기와 이장과 파묘, 나의 조부모와 관련된 기억들이 떠올랐다. 아마 이 책이 아니었다면 소중한 나의 그 기억은 더 깊이 묻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아마 가물가물한 기억속으로 사라졌을지도 모르지.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소녀가장이 된 순자씨로 불리는 이순일씨의 큰딸. 그녀는 묵묵한 책임감으로 온가족 생계의 짐을 졌다. 두동생의 학비, 유학비용, 부모님의 병원진료비., 심지어 결혼 후에도 친정부모님과 위층 아래층으로 함께 산다. 자신의 삶을 애써 억누르면서 지금도 묵묵히 책임을 다하는 큰딸의 모습에서 생계를 책임지는 이 땅의 모든 가장들은 큰 위로를 받을 것 같다. 그녀의 인생이 안타깝고 짠하다. 등이라도 토닥여주고 싶은 등장인물들. 그들의 평범한 이야기가 소중하고 귀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인생이란 ...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참 아름다운 것이기도 하다.
나이를 먹으면서 몸이 쇠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지만(요즘에는 이런 생각도 변했다. 노화를 질병으로 보니까) 그와함께 나의 어린시절을 함께 보냈던 사람들, 건물들, 지형들도 모두 사라져버리더라. 세월이 흐르면서 나의 흔적도 같이 사라지는 거다. 이건 결코 슬픈 게 아니야.
인생의 알맹이 같은 건 어쩌면 바로 이런 "그 숱하고 징그러운 이야기들"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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